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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여자친구

8살에 미국에 온 준이가 지난가을에 대학생이 되었다. 처조카인 준이가 우리와 살게 된 사연은 매우 갑작스럽고 슬픈 일 때문이다. 11년이나 지난 일이다. 어느 날 새벽, 아내의 전화가 울렸다. 새벽에 울리는 전화벨은 늘 불길하다. 그날도 예외는 아니라 서울에 사는 처남이 뇌출혈로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다. 결국 처남은 깨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일 년 후, 준이는 미국에 와서 우리와 살게 되었다. 50대 중반의 나이에 내게 초등학생 아들이 하나 더 생긴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꼬마 녀석이 대견하다는 생각이 든다. 엄하고 잔소리해 대는 나이 많은 고모부와 살며 엄마가 보고 싶다거나 한국에 가고 싶다는 투정 없이 힘든 세월을 잘 견디어 주었다.   알파벳과 간단한 영어 인사만 겨우 익힌 아이를 학교에 보냈다. 곧 친구들을 사귀고, 2년이 지나니 내 도움 없이 숙제도 혼자 해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는 학생 대표로 단상에 올라 에세이를 읽기도 했다.     지난 추수감사절에는 전철을 타고 집에 다녀갔다. 겨울 방학 때도 전철을 타고 오면 토요일 아침에 집 근처 노스리지 역에서 픽업을 하기로 했는데, 금요일 저녁 전화가 왔다. 친구 차를 타고 밤에 온다고 한다. 좀 늦을 것 같다고 해서, 집 열쇠를 문 앞 깔개 밑에 넣어두고 잤다.   다음 날 아침, 아내는 일이 있어 집을 비우고 둘이 아침을 먹는데, 준이가 머뭇머뭇 어렵사리 말을 꺼낸다.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것이다. 어젯밤에는 친구 차를 타고 온 것이 아니라 여자친구 어머니가 데려다준 것이라고 한다. 어디 사느냐고 물으니, 학교 근처가 집이라고 한다. 괜찮다고, 아침에 전철을 타고 가면 된다고 했는데, 극구 우기며 데려다주었다고 한다.     생각해 보니 그 어머니의 의도를 알 것도 같다. 이놈이 어디 사는지 확인도 할 겸, 1시간 남짓 차를 타고 오며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눌 겸 해서 차편을 제공한 것이 아닌가 싶다.     여자친구는 같은 기숙사 동에 산다고 했다. 준이는 이제까지 여자친구는 사귀어 본 적이 없다. 아, 이놈도 이제 여자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구나.     이미 성인이 되고 아버지가 된 세 아들은 모두 고등학교 때 여자친구가 있었다. 하지만 여자친구라고 소개를 받았던 기억은 한두 번에 지나지 않는다. 연애라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이, 누가 가르쳐 주고 설명해 준다고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겪어 보아야, 아,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그것도 잠시 들 뿐이다. 쉽게 잊히는 사랑이 있는가 하면, 오랜 세월 아쉬움으로 남는 사랑도 있고, 결코 잊을 수 없는 사랑도 있다.     그런 사랑을 하기에는 이제 늦은 나이가 되고 나니, 가슴 졸이고 실연에 절망하기도 했던 그 시절이 좋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때 좀 더 과감히 멋진 사랑을 해야 했는데 하는 아쉬움도 있다.     준이에게는 축하한다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 책임 있게 행동해야 한다는 꼰대의 충고도 해 주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이런 사람도 만나고, 저런 사람도 만나. 그 나이에 안 하면 나중에 후회해.”       고동운 / 전 가주 공무원이 아침에 여자친구 여자친구 어머니 초등학생 아들 학교 근처

2023-12-27

[수필] 그리운 그 때 그 시절

김포공항 입구에 송정초등학교가 있다. 나는 이 학교의 28회 졸업생인 것이 자랑스럽다. 올해에 졸업하는 학생은 아마 83회가 될 것이다. 우리는 6·25 한국전쟁 이후에 태어나 모두가 가난했던 60년대 초등학교에 다녔다. 한 반이 60명이 넘는 콩나물시루 같은 교실에서 수업했는데 교실 부족으로 저학년은 오전, 오후반이 있었다.     그 당시는 모두가 춥고 배고팠던 시절이었다. 빈곤이 거의 같은 수준이어서 도토리 키재기였다. 너나 할 것 없이 가난을 안고 살았던 때였다. 학교에서는 격일제로 맛있는 옥수수빵을 배급해 줬는데 그 구수한 냄새는 지금도 내 코를 자극하고 있다. 간혹 부잣집 애들은 도시락이 흰 쌀밥에 계란 프라이가 덮어져 있었고 반찬은 어묵 볶음이나, 소시지였지만 나처럼 가난한 아이들은 보리밥에 반찬은 김치가 고작이었는데도, 뭐가 그리 즐거웠는지 키득거리며 불만 없이 뛰어놀았고 병원이 무엇인 줄 모르고 건강하게 자랐다. 겨울철에는 교실에 조개탄 난로를 피웠는데 양은 도시락을 가져가면, 난로에 얹어 놓았다. 맨 밑 도시락은 탈까 봐 당번이 위로 바꾸어 가며 놓았었다.     하굣길에 교문을 나서면 행상 아주머니 곁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또 뽑기’를 하였다. 연탄불 위에 국자를 올려놓고 흑설탕을 녹여서 별 모양의 금형을 찍은 것을 부러뜨리지 않고 떼어먹으면 한번 더 할 수 있었다. 또 하얀 돌 설탕을 국자에 녹여서 소다를 넣어 부풀려 먹었던 것을 ‘달고나’라고 했는데 10원을 지불하면 먹을 수 있는 군것질이었다. 누에고치를 삶아서 명주실을 뽑아내고 남게 되는 것이 번데기인데 그 맛은 참으로 고소했다. 신문지를 잘라서 꼬깔콘 모양으로 만든 작은 봉투 번데기는 5원, 큰 봉투에 담은 것은 10원을 주고 사서 먹은 기억이 난다.   당시에 여자애들이 운동장에서 고무줄놀이를 하면 남자애들은 면도칼로 고무줄을 끊어 놓고 줄행랑쳤었다. 그 여자애들에게 관심이 있다는 표현을 그런 식으로 했었나 보다. 그 여학생들은 방과 후 운동장의 풀을 호미로 캐내는 것도 숙제의 하나였다. 그때는 피서 방법이 달리 없었던지라, 행주산성 맞은편 개화산 밑에 ‘보물웅덩이’이라 일컫는 커다란 연못이 있었는데 여름철 한낮, 벌거숭이가 되어 동무들과 미역을 감곤 하였다.     그 시절에 TV가 있는 집이 공항동 전체에서 한 집밖에 없었다. 김일 선수 레슬링 시합이 있는 날이면 낮에 그 집에 가서 마당 청소를 해주고 밤에 그 경기를 시청할 수 있었다. 프로레슬링이 각본에 짜인 대로 진행하는 쇼란 것을 성인이 된 후에 알았다. 하지만, 김 선수가 시종일관 반칙을 당하여 수세에 몰리다가 박치기 서너번으로 승부를 뒤집는 것을 보았을 때, 어린 마음에 어찌나 그렇게 통쾌했던가?     소풍 가는 날, 줄지어 걸어서 학교 근처 야산으로 가는 것이 단골 행선지였다. 김밥에 삶은 계란 두어개, 사이다 한 병을 꿰차면 최고의 소풍 도시락이었다. 이날은 멀쩡하던 날씨도 으레 비가 왔는데 ‘소사 아저씨가 커다란 구렁이를 삽으로 때려죽여서 그렇다’는 괴담이 돌기도 했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이 외국 순방 차 출국하거나, 외국 국가 원수가 방한하면  전교생이 동원되어 도로변에 줄지어 서서 종이 태극기를 흔드는 것은 빠질 수 없는 행사였다.     이 모든 지나간 일들은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그리움으로 남아 노을 진 석양, 서산에 걸려있다. 우리는 졸업 후 초등학교 동창 모임을 사계절마다 연 4회씩 갖고 있다. 졸업 기수를 기념하기 위하여 될 수 있으면 28일 개최한다. 나도 고국을 방문했을 때 두 번 참석한 적이 있다. 많을 때는 50명 정도 모일 때도 있다. 그 모임에서는 학력의 차이를 따지지 않는다. 또 빈부의 격차도 상관치 않는다. 더구나 사회적 신분의 차이도 문제시하지 않는다. 똑같이 동등한 입장에서, 만나면 격의 없이 소주잔을 기울이며 지난날을 회상해 보기도 한다. 할머니들을 아무개  엄마가 아닌 ‘영자’ ‘순자’로 호칭할 수 있어서 좋다. 남녀 구별 없이 ‘너’로 통용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때의 추억들은 이제 평생 잊지 못할 소중한 보물이 되었다. 우리가 서로의 인생을 지켜보며  지지와 격려를 해주고 받는 다정한 인연을 쌓아 가고 있으니 말이다.   친구들아! 이제는, 우리도 내일모레면 70줄이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은 신의 섭리에 맡기고, 우리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살자.   누런 콧물을 자주 훌쩍거리던 녀석을 ‘코흘리개’란 별명으로 불렀는데 오늘따라 유난히, 그 친구가 보고 싶다. 이진용 / 수필가수필 양은 도시락 봉투 번데기 학교 근처

2023-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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